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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편집2024-04-19 19:07 (금) 기사제보 구독신청
“어찌 백성을 탓할 것인가”
“어찌 백성을 탓할 것인가”
  • 박흥순 기자
  • 승인 2016.08.01 14:0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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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8월 현재 대한민국은 사분오열 갈라져 있다. 99%의 ‘개돼지’들은 갈팡질팡 혼란에 빠져 있고 이를 수습할 수 있는 ‘지도자’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먹고 살게만 해주면 된다던 ‘그 사람’의 말과 다르게 온 국민이 먹고 사는 것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미사일 문제를 연일 입에 담는다. 놀라운 점은 이 불안과 갈등의 시작이 정부의 ‘긴급발표’에서 비롯됐다는 점이다. 국민이 안심하고 잘 살 수 있는 나라를 만들어야 할 정부가 위기관리는커녕 되레 위기를 증폭시키는 악수를 둔 것이다.

역사는 거울이다. 단지 과거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현재에 활용해야 하며 미래에 활용 가능한 콘텐츠를 만드는 것이 역사의 본질이라 할 수 있다.

최고의 성군이자 ‘위대한 천재 왕’이었던 세종은 우리 역사에서 가장 존경받는 인물이다. 당대에 이미 ‘해동요순’이라 불려 지금까지 비판이 금기시되다시피 했으며, 초인화·신화화된 부분마저 존재한다. 그러나 신격화의 포장을 벗겨버린다 해도 세종이 후대 위정자들의 모범이 되는 왕이라는 사실에 반론이 제기될 가능성은 없다. 국가 리더십이 사라진 지금, 우리가 세종 같은 리더를 원하는 것은 당연하다. 

‘소통의 천재 세종’

세종은 근래 들어 꾸준히 회자되고 있다. 세종은 안보와 경제난이라는 두 가지 짐을 지고 왕위에 올랐다. 그는 “나라 안팎으로 평안하고 나라의 창고를 넉넉하게 하겠다”고 선언했다. 역대 다른 왕들도 이 같은 말을 했지만 세종은 그들과 다른 점이 있었다. 세종은 백성의 뜻을 알기 위해 하루 종일 사람을 만나고 의견을 들었다. 아침에는 하루 두 시간씩 윤대(輪對) 했다. 누군가와 돌아가며 독대하는 윤대를 통해 세종은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귀 담아 들었다. 미관말직에 있는 이도 세종과 독대할 수 있었다. 
점심을 먹고 나면 어전회의인 경연(經筵)을 통해 신하들과 소통했다. 경연은 태조 때 23회, 태종 때 80회 열렸지만 세종 때는 1천898회나 열렸다. 경연엔 나이 든 관료와 젊은 집현전 학자들을 함께 참석시켰다. 세대를 아우르는 생각을 듣기 위함이었다.
세종의 밤은 구언(求言)으로 이어졌다. 구언은 백성들로부터 이야기를 구하는 자리다. 매일같이 전국 각지에서 올라오는 상소문을 검토하고 구언을 통해 밤늦도록 중요한 정책에 대해 백성들의 의견을 얻는 것도 잊지 않았다. 윤대와 경연, 구언으로 이어지는 하루는 세종과 백성을 잇는 소통의 장이었다.

세종은 특히 반대 의견을 내는 신하들에게 관용적이었다. ‘고약해(高若海. 1377~1443)’는 사사건건 세종의 의견에 반대했다. 정도가 지나쳐 눈을 부라리고 노려보거나 보란 듯 세종 앞에서 휑하니 나가기까지 했다. 세종은 이를 못마땅해 하면서도 그를 대사헌에 임명했다. 다른 신하들도 마음껏 말문을 열라는 주문이었다. 한글을 만들 때 가장 극렬하게 반대한 사람은 최만리(崔萬理. ?~1445)였다. 최만리는 한글 반포 이후에도 지나치리만큼 거칠게 한글 불가론을 외쳤다. 참다못한 세종이 내린 형벌은 하룻밤 옥살이였다.
세종은 일방적인 의견을 경계했다. 국가 주요 정책에 대해 늘 ‘해보자’는 의견과 ‘해서는 안 된다’는 의견이 맞서도록 했다. 어느 한 편을 들지 않았음은 물론이다. 다만 ‘해서는 안 된다’는 쪽은 ‘왜 안 된다’고 하는지, ‘해보자’는 쪽은 ‘왜 해볼 만한지’를 들어보고, 이를 통합하는 방법에 대해 고민했다. 반대 의견을 평생 머리에 이고 살았던 세종 시대에 역사상 가장 많은 인재가 들끓고 찬란한 업적을 남긴 것은 곱씹어 볼 일이다.

외교와 안보의 ‘통찰력’

세종은 치우침을 경계했다. 이는 국정 전반에 영향을 미쳐 문무(文武)가 고루 발달하는 계기가 됐다. 아울러 주변국과의 관계에서도 한쪽으로 기울지 않고 적당한 균형을 유지하는 뛰어난 외교 감각을 보였다.
‘사대교린(事大交隣)’ 정책을 기본으로 한 외교 체계는 철저하게 국가와 백성들의 삶을 윤택하게 만들기 위한 방향으로 전개됐다. 매년 명(明)에 사절을 보내 앞선 문화를 받아들이고 물품을 교역했다. 이는 일종의 공무역이라 할 수 있는데, 이를 통해 조선과 세종은 경제적, 문화적인 실리를 얻을 수 있었다. 또, 명과의 무역을 통해 왕권을 강화하고 안정시킬 수 있었으며, 동아시아에서의 국제적인 지위를 확보할 수 있었다.
이와 함께 북방의 이민족 여진(女眞)에 대해서는 회유책과 강경책을 동시에 쓰는 교린(交隣) 정책을 적극적으로 펼쳤다. 여진족의 귀순을 장려해 관직과 토지 등을 주어 주민으로 동화시키는 데 힘썼다. 1438년 세종은 지금의 동대문 근처에 야인관으로 불리던 건물을 북평관으로 고쳐 사절의 왕래를 통한 조공 무역을 허용했고 국경지역의 경성과 경원에 무역소를 두고 물물교환을 허락했다. 여진족은 말, 모피 등을 가져와서 직물, 농기구, 식량 등 일용품으로 바꿔갔다. 그러나 여진족이 국경 마을을 약탈하는 일이 자주 일어나자 세종은 군사력을 동원해 이들의 근거지를 토벌하기도 했다. 또, 세종은 국토 방어를 위해 국경 부근 압록강과 두만강에 4군 6진을 설치했다. 그리고 토착민을 토관으로 임명해 자치를 허용했으며, 강변 지역을 전략 촌으로 편제해 여진족의 침략에 대비했다.

일본에 대해서도 세종은 교린 정책을 원칙으로 했다. 일본의 막부 정권은 조선에 일본 국왕사를 파견하고, 조선에서는 일본에 통신사를 보냈다. 일본과의 교역은 대체로 동래에 설치한 왜관을 중심으로 이뤄졌으며, 대마도와는 조공의 형식으로 교역했다. 목화의 경우 당시 일본에서는 생산되지 않는 생필품이었는데 의생활에 혁명을 일으킨 정도로 큰 영향을 주기도 했다.
일본과의 관계에서 빼놓을 수 없는 가장 큰 문제는 왜구였다. 고려 말부터 시작된 왜구의 침략은 조선 초기에도 계속돼 해안 지방의 백성을 괴롭혔다. 이에 세종은 왜구의 근거지인 대마도(쓰시마 섬)를 토벌했다. 1419년 이종무는 병선 227척과 군사 1만7000여 명으로 왜구의 소굴인 대마도를 정벌했다. 이 토벌로 상당 기간 동안 왜구의 침입을 방지할 수 있었다.
“백성이 나를 비판한 내용이 옳다면 그것은 나의 잘못이니 처벌해서는 안 되는 것이오. 설령 오해와 그릇된 마음으로 나를 비판했다고 해도 그런 마음을 아예 품지 않도록 만들지 못한 내 책임이 있는 것이니 어찌 백성을 탓할 것인가”
세종은 철저하게 애민(愛民)·위민(爲民) 사상을 보여주며 백성들 스스로 따르게 했다. 한 국가를 움직이는 수장으로 모든 일에 백성을 우선으로 여겼고, 그들이 행복하지 못한 것을 자기 탓이라 여겼다. 자신에게 주어진 권력을 허투루 쓰지 않았고, 타인을 두려워할 줄 알았으며, 더 나은 방법을 실행할 용기와 배짱이 있는 진정한 리더였다.
서로 자기만 옳다고 여기는, 자기만 잘났다고 강변하는, 자기 이익만 생각하고 ‘립서비스’에만 정신이 팔린 ‘자칭 국가의 리더’들이 가득한 세상에서 세종이 더욱 그리워지는 이유다.

인사이트코리아, INSIGHT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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